원.
커피를 마시던 그 자를 바라보며 얼굴을 감싸고 있자, 이내 그 자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건넨다.
"내가 당신의 원에 들어온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요."
원? 원이라, 무얼 말하는 걸까? 나의 시간을 말하는 걸까? 내가 있는 이 아주 사적이고 개인적인 공간을 말하는 걸까?
사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정중함을 가장하며 그 자의 말을 애써 부인한다.
"그렇지 않소, 조금 당황스러울 뿐이지, 이런 일은 평생 겪어보지 못한 일이기에."
그런 사내의 말에 그 자의 입가에 걸려 있는 미소가 더욱 깊어진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지시오. 굳이 그렇게 숨을 필요 없소. 누가 봐도 당신은 지금 내가 불편한 듯 보이는 군."
그걸 알고 있으면서 저리 말한다니, 이 어찌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인가?
겉으로는 최대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그 자에 대한 최대한의 욕설을 퍼붓는다.
'게다가 솔직해 지라니, 본인이 다 알고 있으면서 뭘 더 솔직해 지라는 건가?'
그런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그 자가 생각을 끊고 들어온다.
"누구에게나 원이 있는 법이오. 그리고 그 원을 어떻게 할지는 자신이 결정하는 법이지. 당신은 그 원을 최대한 옅게 만들려 하는군?"
옅게 만든다니, 아니 애초에 스스로 이 이야기를 이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사내는 슬슬 자리를 떠야 함을 느꼈다.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야, 내 시간이 모두 쓸데없이 버려지고 있군! 저런 상종 못할 무례한 자 때문에 말이지!'
"당신이 원에 대해 어떻게 할지 분명히 하지 않으니 내 원에 그렇게 밀려 버리는 게 아니겠소? 더 진하게, 확실히 하는 게 중요한 거요."
그 자는 사내가 말을 하지 않자 계속해서 스스로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에 더 참지 못하고 사내가 소리친다.
"도대체 원이라니!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이상한 헛소리 하지 마시오! 당신 때문에 내가 즐기고, 맛보아야 할 나의 시간이 이렇게 사그라들고 있지 않소!"
자리를 박차며 일어나 외치는 사내의 말은 주변의 모든 이들이 놀란 얼굴로 돌아볼 정도로 큰소리였기에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이런 실례를 저지르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이게 모두 저치 때문이야.'
그러나 오히려 그 자는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젖혀 크게 웃으며 사내에게 말한다.
"바로 그거요! 그거란 말이요! 그거야 말로 스스로의 원을 지키는 것이요! 나는 그걸 원했소! 이제 속이 후련하지 않소?"
'후련할 게 따로 있지, 이 무슨 부끄러운 일을...'
사내는 그 자의 말을 들으며 붉은 얼굴을 숨기며 서둘러 자리에 앉는다.
그리곤 아직도 자신을 바라보며 웃음을 짓는 그 자를 노려 보다 이내 헛웃음을 짓는다.
"그래, 그렇다 칩시다. 그래서 당신 이름은 뭡니까? 내 이름은 '하이드 브라운'이라고 하오."
그에 그자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하하! 만나서 반갑소 브라운 씨, 내 이름은 '와이트', '존 와이트'라고 합니다."
와이트 씨의 손은 아주 두텁고 거칠었으며 악력이 대단했다.
"'하이드'면 충분합니다."
악력에 눌린 손을 몰래 털어내며 다시금 자세를 바로 한다. 그리곤 궁금했던 것을 묻는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도대체 원이 뭡니까?"
그러자 와이트 씨는 웃으며 대답한다.
"원이란 모두가 가지고 있는 거지요. 당신도, 나도, 그리고 여기 있는 모두도! 그렇기에 하이드 씨, 원을 지키는 건 아주 중요하답니다."
모두가 가지고 있다라, 그렇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원이란 무엇일까?
그런 하이드 씨의 모습을 본 와이트 씨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였다.
"그리 고민할 필요도 없어요! 하이드 씨, 당신은 아주 잘하고 있으니 말이오. 방금 전처럼 원을 지켜내면 되는 겁니다. 물론 모든 경우가 같지만은 않겠지요. 간혹 내 원이 찌그러지고, 옅어지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원을 잃어선 안됩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원을 빼앗기고 만단 말입니다!"
여전히 그의 말을 이해하는 게 어렵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잡힐 듯 말 듯 한 무언가가 눈 앞에 어른거리는 듯하다.
고민에 빠져 사색에 잠긴 하이드 씨의 모습을 본 와이트 씨는 아주 조용히, 다시금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는 탁자 위에 놓여있는 티슈에 품에서 꺼낸 만년필로 무언갈 쓰더니 이내 잔 아래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참을 고민하던 하이드 씨는 이내 무엇을 깨달은 듯 고개를 들어 와이트 씨를 찾지만 그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사위는 이미 시간이 흘러 붉고 자색이 섞인 하늘이 모두를 감싸고 있다.
"...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나...?"
허탈감에 시선을 내리자 잔 아래 자리한 티슈가 보인다. 티슈 위에 글을 쓰는 것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주 수려한 글씨체로 쓰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오늘 커피는 아주 맛이 좋았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대접하기로 하지요. 그럼 그때를 기약하며. >